[내생각] 인지적 편향이 알려주는 세상

전략적 의미 세상 일반적으로 인지적 편향이 세상을 왜곡되게 알려준다고 생각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편향에 의해 비합리적 결론에 다다르는 것을 부정적으로 본다. 그래서 똑똑한척하며 지적하는 것을 즐기는 댓글러들을 많이 본다.  '남자는 여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도 있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야!'라고 한다거나. 무슬림 테러리스트에 대해서 비난하면 '무슬림이 곧 테러리스트라고 편향된 시각을 가질 우려가 있어'라며 지적한다.  하지만 인지적 편향이 세상을 왜곡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다음 두가지다. 하나는 인지적 편향을 가지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과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세상 간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험하는 세상이란 전략적 의미 세상이란 뜻으로 한 말이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세상이란 정보가 부족하다. 상대의 힘, 의도, 뒷배경 등등을 우리는 모른다. 어느 유튜브 영상에서 이런 예를 든 것을 본 적이 있다. 노량진 수산 시장에 회를 먹으러 갔다. 이제 수없이 많은 횟집들 가운데서 한 군데를 골라 식사를 해야 한다. 어느 식당으로 가야 할까? 정보가 부족하다면 정보를 모으는 것이 합리적이다. 모든 식당에 일일이 들러서 맛을 보고 분위기를 봐야 한다. 하지만 힘들다면 적어도 구석구석 모든 골목을 둘러보고 결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내가 '실제 세상'과 구분하여 '실제로 경험하는 세상', '전략적 의미 세상'이라고 한 것은 방금 말한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문장의 현실이다. 노량진 수산 시장의 예로 다시 돌아가 보자. 현실에서의 우리의 행동은 일단 서있는 그 자리에서 보이는 각 식당들의 겉을 보고 청결도, 음식냄새, 수조의 물고기들의 신선도, 간판에 보이는 음식사진, 쇼윈도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의...

[책] 총.균.쇠

총.균.쇠 저자 : 제레드 다이아몬드 짧은 요약 단순 편의를 위해 문명권, 비문명권이라고 지칭한다. 이 책은 '어째서 문명권은 풍족한 물질을 가질 수 있었는가?'에 대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대답이다. 자칫 오해할 수 있는데 저자의 답이 총균쇠는 아니다. 총균쇠는 결론이고 저자는 어째서 문명권이 총, 균, 쇠를 가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답한다. 대개의 문명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꽃피웠으며 비유라시아권에서는 성장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유라시아대륙은 동서로 긴 반면 비유라시아대륙은 남북으로 길기 때문이라고 한다. 작물과 가축은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는 바, 위도가 비슷하여 비슷한 기후를 공유한 유라시아에서는 기술의 전파가 쉬웠던 반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는 남북으로 길어 기후대가 다르기에 작물과 가축의 전파가 어려웠다고 한다.  가축화나 작물화는 생각보다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며 가축화나 작물화가 가능한 종의 수가 불행히도 비유라시아 대륙에서는 적었다고 한다. 식량과 동력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대규모의 집단생활이 가능해졌다. 집단생활에 더해 가축과 함께 거주하면서 전염병이 발생하며 문명권의 사람들에게는 질병에 대한 면역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문명권의 사람들이 비문명권에 접촉했을 때 면역력이 없는 비문명권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그 이후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아는데로 분업화가 되고 문자와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고도화 되었다. 결국 지리적 환경이 문명권과 비문명권을 나눈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말한다. 일반적인 평과 내 생각 인종적 편견을 타파하는데 기여하였다. 너무 환경결정론적이다. 인종적 편견을 타파하는데 기여하였다는 의견에는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더 깊은 의미는 인간 세상을 구조적으로 바라보는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인격적인 요인으로 설명한 것이다. 환경결정론적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첫째로 환경결정론이 아니라 환경중력론이라고 말해야한다고 본다. 중력은 지상의 모든 것을 내...

[생활] 실제 홈트레이닝 고려해야 할 사항

홈트레이닝 운동 고려 사항 1. 갖추어야 할 운동 기구가 가격이 저렴하고 크기가 작고 안정성이 있어야 한다. 홈트의 최대 장점이 접근성이 좋다는 것이다. 접근성은 시간적 공간적 의미일뿐만 아니라 금전적인 의미 또한 포함한다. 비싼 운동기구를 사용해야한다면 그것 자체로 접근성이 떨어진다. 또한 안정성이 있어야한다. 기구가 불안정하면 운동에 오롯이 집중할 수가 없다. 집중할 수 없다면 성과도 없지만 불편함 때문에 심리적 문턱이 생긴다. 심리적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운동기구의 예로 가벼운 치닝디핑철봉이나 문틀철봉이다. 치닝디핑철봉은 무게가 가벼우면 흔들거려서 안정성이 떨어지며 문틀철봉은 철봉 자체가 떨어질 수도 있으며 2. 한번에 최대한 많은 운동 효과를 줘야한다. 많은 부위의 근육을 자극하면서 유산소와 무산소의 운동효과를 동시에 가지는 것이 좋다. 그래야만 시간적으로 효율적이며 고통의 시간도 짧아진다. 3. 좁은 공간에서 가능해야한다. 집에서 생활공간을 제외하고 공간을 내서 해야한다. 더군다나 나는 운동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은 사실 가장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운동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강건한 몸을 만들고 강건한 몸에서 만들어진 강건한 정신으로 문제 상황을 해결해 나가야한다. 가진 것이 없으면 좁은 곳에서 살게 되기 마련이다. 좁은 곳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란건 그래서 없는 사람에게 더욱 필수적인 요소이다. 홈트레이닝으로 몸을 개조하여 삶을 개척해야 한다. 그래서 운동기구는 최대로 커도 하프랙이 최대치이다. 케이블 머신까지 집에 들여 홈트를 하느니 그냥 헬스장에 다니는 것이 낫다.  4. 쿵쾅거리거나 소음을 내서는 안된다. 아파트처럼 대부분은 여러 가구가 함께 산다. 소음에 조심일 수 밖에 없다. 도구의 제약이 별로 없다는 것만으로 쿵쾅거리는 운동을 추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생각이 없는 것이다. 마운틴클라이머나 점프 스쿼트같은 것은 분명 좋은 운동이지만 이런 면에서 홈트에 적합한 운동이 아니다. 홈트에 적합한 운...

[글] 비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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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검 젊은 무사도 명심해야 할 일이 있고, 검술에는 비검이라 칭하는 것이 있다. 필승불패라 함은 난 상대의 칼을 받지 않고 내 칼만이 상대에게 닿도록 몸을 비틀어 7전8도하는 술리. 참으로 언어도단이 아닌가. 나만이 살고자 하여 상대의 눈을 속이려 한다면 도적배들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진정한 무사의 검법은 오직 하나. 검을 들고 상대가 닿는 곳까지 접근하여 휘두르는 것이다. 여기엔 잔꾀도 기술도 필요 없다. 내 칼이 닿는 거리이니 상대의 칼도 내게 닿을 터. 중요한 건 상대에게 다가가 검을 내리칠 뿐이다. 진정한 검사는 승부를 생각지 않고 오직 죽을 각오로 검을 휘두를 뿐이다. 이리해서 꿈은 깰 것이니. =============== 시구루이 6권 마지막에 쓰여진 글이다. 누가 쓴 글인지는 모르겠다. 글전체에 걸쳐서 정정당당함을 피력하고 있다. 그것이 무사도에 걸맞다며 정정당당함의 당위성을 내세운다. 하지만 나는 도덕적 당위가 아닌 전략적 측면에서 읽었다. 비검을 날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잔꾀도 없고 기술도 없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을 아둔한 사람이라 부른다. 아둔한 자에게 필사의 각오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할 줄 아는 것이 적에게 다가가 휘두르는 것이 전부라면 적어도 그것 하나는 필사의 각오로 휘둘러야 하는 것이다. 돈도 없고 백도 없고 재능도 없다면. 오로지 정면승부만을 봐야한다면 두가지 선택만이 있다. 체념하고 대충할 것이냐, 필사의 각오로 임할 것이냐. 체념하고 대충하는 것은 반드시 죽는 길이요, 필사의 각오로 임하는 것은 살아날지도 모르는 길이다. 이전 '광기에 대해'에서 말한 바와 같이 패배가 분명한 싸움을 승패가 불분명한 지경까지 밀어붙이게 만들 수 있는 길이다. 이러한 아둔한 자의 전략을 시행함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것이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승부를 생각지 않고 오직 죽을 각오로 검을 휘두를 뿐이다" 승부를 생각하지 말아야한다. 승부를 생각하고 패배를 예측하면 움츠러들고 검을 휘두를 수 없다...

[글] 광기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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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기에 대해 야마구치 타카유키 '무사도는 죽음에 미치는 것. 수십 명이 한 사람을 죽이기 어렵다.' 무사도란 죽음에 미치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 있는 한 사람을 죽이는데 수십 명이 덤벼도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라고 「엽은(葉隱)」에 적혀있다. '무사도를 분별할 수 있다면 이미 늦은 것이다.' 검술은 이론이라 일상 대결에서 자기 기량보다 뛰어나면 패할 것이고, 못하면 이기며, 비슷하면 무승부가 되기 마련이다. 허나 검술을 배워 이와 같은 사려가 가능해진다는 것은, 무사도에 있어서는 한 수 뒤처진 것이라고 「엽은」은 경고하고 있다. 싸우기 전에 사고 속에서 손익계산을 하고, 결국 행동은 미수에 그치는 자는 무사가 아니라 비겁자다.  무사도에 있어서는 상대가 한 수 위든 다수이든 싸워야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승리하는 것이 결국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제정신으로는 대업을 이룰 수 없다.' 죽음을 각오하고 매사에 임해야만 승부의 끝이 분명한 싸움을 예측불능의 영역까지 밀어붙일 수 있다.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입은 자가 사자의 무리를 향해 가야할 때, 평범한 자가 재능 있는 자와 싸움을 결심할 때, 「엽은」의 이 한 구절이 눈부시게 빛나 보일 것이다. 죽으려고 미치는 것만이 생명의 마지막 기댈 곳이 된다. ※엽은(葉隱) : 18세기초, 야마모토 조초가 저술한 서적. ============================ 시구루이 2권 마지막에 실린 작화가 야마구치 타카유키의 글이다. 왜색이 물씬 풍기는 사무라이 만화에 실린 극단적인 내용의 글이라 우익 사상처럼 보이기도 하고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자면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 필생즉사'와 동일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이순신 장군의 명언은 언뜻 생사가 오가는 전장과 같은 매우 특수한 상황에서만 통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

[글] 잔혹에 대해

 잔혹에 대해 난조 노리오 인간의 감정이 극단으로 달릴 때 잔혹은 태어난다. 아무 문제없이 일상생활이 평온하게 영위되고 있을 때, 잔혹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문제가 발생하고, 사회나 세상, 주변의 인간관계가 그 문제를 완화시킬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인간의 감정이 극으로 달렸을 때 드러나는 것이 잔혹이다. 인간의 감정이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는 다양한데, 예를 들면 슬픔 등이 그 하나다. 내가 무사의 아내 등을 소설로 쓸 때는 그런 슬픔을 표현하는데, 무사의 문제를 소설로 쓸 경우에는 잔혹을 표현한다. 나는 무사를 소설의 소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당연히 「잔혹」도 많아진다. 남자의 감정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잔혹해졌을 때다. 남자도 부드러움을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딘가 연극적이다. 남자의 경우 잔혹해졌을 때 그 본성이 나온다. 그래서 남자의 세계를 현실로 표현하려면 잔혹은 필수다. 예나 지금이나, 세계 어디서나 그렇다. 역사상의 문제를 뭔가 하나 들춰보면 된다. 그것을 더 파고들면 반드시 잔혹한 상황이 있을 테니까···. 나는 주로 역사소설을 써 왔지만, 예전의 사회에서는 잔혹이 드러나기 쉽다. 그곳에서는 뭐든 잔혹하다. 전국시대의 무장들처럼 대립을 완충해주는 조직이 없는 곳에서는 모두가 적대자와 직접 부딪쳐야만 한다. 자신이 이기든지 적의 손에 죽든지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에는 사람들이 웃어른이나 동료들에게도 감정을 억누르며 살았기 때문에, 일단 그 균형이 깨지면 모든 것이 충돌하게 된다. 여러 감정들이 일시에 분출되고 극단으로 달린다. 잔혹해진다. 인간이 원래부터 잔혹한 동물인 것은 아니다. 뭔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에 대립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다. 평온하고, 잔혹이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회도 역사 속에는 많이 존재한다. 잔혹이 표면화하지 않도록 제어하는 게 무릇 정치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문제가 없는 세계, 있어도 그 문제를 받아들이고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는 인간...

[책] 시구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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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 난조 노리오 작화 : 야마구치 타카유키 시구루이를 본 지도 어느 덧 20년이나 지났다. 하지만 처음 시구루이를 봤을 때의 충격은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시구루이 전에 나온 사무라이물이라면 바람의 검심, 사무라이 디퍼 쿄우, 사무라이 참프루, 아프로 사무라이, 무한의 주인, 베가본드 같은 것들이 있다. 거기서 묘사하는 것은 예술 혹은 게임과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을 베어도 상처 하나 없이 HP만 깎이는 것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거기에 진지함을 더하려 예술적인 동작이나 만화적으로 보이는 화려한 검술을 넣기도 했다.  좀 특색 있었던 작품이라면 베가본드인데 베가본드의 사무라이들은 검객이 아닌 철학자들이었다. 칼부림을 하는데 심오한 뭔가를 따지고 있었다. 열광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에겐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시구루이는 전혀 다르다.  잔혹하고 광기에 차 있으며 현대인의 정서와는 전혀 맞지 않다. 시간적으로는 몇백년 차이인 현대와 가깝지만 거기서 묘사하는 인간은 몇만년전 창으로 짐승을 찌르는 원시 수렵인에 더 가깝다. 야수로써의 인간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설득력있게 느껴졌다. 손으로 칼을 들고 적의 뼈와 살을 가르는 인간의 정신은 인간보다는 짐승에 더 가까울 것같기 때문이다.  시구루이에 대한 다른 리뷰를 몇편 보았다. 대개 잔혹한 묘사에 중점을 맞춘다. 하지만 시구루이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은 잔혹 자체가 아닌 어떠한 인간상이고 잔혹한 묘사는 그 인간상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일뿐이라고 생각한다. 시구루이에서 보여주고 싶어하는 그 인간상은 야만의 인간, 짐승으로써의 인간이다.  1권 말미에 원작자 난조 노리오가 쓴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그걸 조용히 억누르려 하지 않고 감정이 폭발해버리는 인간, 감정을 극단으로 밀어내는 인간이다" 이것이 내 생각에 신뢰를 더 한다. 지금의 문명은 야성을 억누른다. 일본의 정신과 의사 구마시로 도루는 그의 책 "쾌적한 사회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