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총.균.쇠

총.균.쇠 저자 : 제레드 다이아몬드 짧은 요약 단순 편의를 위해 문명권, 비문명권이라고 지칭한다. 이 책은 '어째서 문명권은 풍족한 물질을 가질 수 있었는가?'에 대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대답이다. 자칫 오해할 수 있는데 저자의 답이 총균쇠는 아니다. 총균쇠는 결론이고 저자는 어째서 문명권이 총, 균, 쇠를 가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답한다. 대개의 문명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꽃피웠으며 비유라시아권에서는 성장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유라시아대륙은 동서로 긴 반면 비유라시아대륙은 남북으로 길기 때문이라고 한다. 작물과 가축은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는 바, 위도가 비슷하여 비슷한 기후를 공유한 유라시아에서는 기술의 전파가 쉬웠던 반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는 남북으로 길어 기후대가 다르기에 작물과 가축의 전파가 어려웠다고 한다.  가축화나 작물화는 생각보다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며 가축화나 작물화가 가능한 종의 수가 불행히도 비유라시아 대륙에서는 적었다고 한다. 식량과 동력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대규모의 집단생활이 가능해졌다. 집단생활에 더해 가축과 함께 거주하면서 전염병이 발생하며 문명권의 사람들에게는 질병에 대한 면역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문명권의 사람들이 비문명권에 접촉했을 때 면역력이 없는 비문명권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그 이후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아는데로 분업화가 되고 문자와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고도화 되었다. 결국 지리적 환경이 문명권과 비문명권을 나눈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말한다. 일반적인 평과 내 생각 인종적 편견을 타파하는데 기여하였다. 너무 환경결정론적이다. 인종적 편견을 타파하는데 기여하였다는 의견에는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더 깊은 의미는 인간 세상을 구조적으로 바라보는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인격적인 요인으로 설명한 것이다. 환경결정론적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첫째로 환경결정론이 아니라 환경중력론이라고 말해야한다고 본다. 중력은 지상의 모든 것을 내...

[글] 잔혹에 대해

 잔혹에 대해

난조 노리오
인간의 감정이 극단으로 달릴 때 잔혹은 태어난다.

아무 문제없이 일상생활이 평온하게 영위되고 있을 때, 잔혹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문제가 발생하고, 사회나 세상, 주변의 인간관계가 그 문제를 완화시킬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인간의 감정이 극으로 달렸을 때 드러나는 것이 잔혹이다.

인간의 감정이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는 다양한데, 예를 들면 슬픔 등이 그 하나다. 내가 무사의 아내 등을 소설로 쓸 때는 그런 슬픔을 표현하는데, 무사의 문제를 소설로 쓸 경우에는 잔혹을 표현한다. 나는 무사를 소설의 소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당연히 「잔혹」도 많아진다.

남자의 감정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잔혹해졌을 때다.
남자도 부드러움을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딘가 연극적이다. 남자의 경우 잔혹해졌을 때 그 본성이 나온다. 그래서 남자의 세계를 현실로 표현하려면 잔혹은 필수다.
예나 지금이나, 세계 어디서나 그렇다. 역사상의 문제를 뭔가 하나 들춰보면 된다. 그것을 더 파고들면 반드시 잔혹한 상황이 있을 테니까···.

나는 주로 역사소설을 써 왔지만, 예전의 사회에서는 잔혹이 드러나기 쉽다. 그곳에서는 뭐든 잔혹하다. 전국시대의 무장들처럼 대립을 완충해주는 조직이 없는 곳에서는 모두가 적대자와 직접 부딪쳐야만 한다. 자신이 이기든지 적의 손에 죽든지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에는 사람들이 웃어른이나 동료들에게도 감정을 억누르며 살았기 때문에, 일단 그 균형이 깨지면 모든 것이 충돌하게 된다. 여러 감정들이 일시에 분출되고 극단으로 달린다. 잔혹해진다.

인간이 원래부터 잔혹한 동물인 것은 아니다.
뭔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에 대립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다. 평온하고, 잔혹이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회도 역사 속에는 많이 존재한다. 잔혹이 표면화하지 않도록 제어하는 게 무릇 정치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문제가 없는 세계, 있어도 그 문제를 받아들이고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는 인간들은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없다. 난 그런 것엔 흥미도 없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그걸 조용히 억누르려 하지 않고 감정이 폭발해버리는 인간, 감정을 극단으로 밀어내는 인간이다.

난조 노리오
1908년 도쿄태생.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와 경제학부를 졸업.
동아경제간담회 참사. 일본재건위원회 상무이사. 경제단체 연합심의실위원 등을 역임.
국학원대학교수.
56년 「등대귀」로 나오키상.
82년 「호소카일기」로 요시카와에이지 문학상을 수상.
「월영병고시리즈」 「원록 태평기」등 저작다수.
60년의 「고성이야기」 등을 통해 잔혹스토리의 붐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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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구루이 1권 마지막에 실려있는 원작 소설가 난조 노리오의 글이다.
난조 노리오는 잔혹에 매혹된 듯 하다. 글의 제목도 '잔혹에 대해'이다. 하지만 글을 모두 읽고서 나는 다른 부분에 눈길이 끌렸다.
인간에게 잔혹이 생기는 지점을 말하는 부분에서 나는 잔혹 보다는 야성이 보였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명의 털없는 원숭이가 가진 야성 말이다.

윗 글에서 난조 노리오가 정치라고 말하는 부분은 넓게 말하면 문명으로 읽힌다. 난조 노리오는 현대 일본사회에서 문명화되어 야성이 거세된 인간에 뭔가 재미없음을 느끼고 막부시대의 잔혹에서 야성을 느끼고 매혹된 것이 아닐까?

나는 야성에서 원초적 생명력을 느낀다. 그래서 난조 노리오의 글 마지막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걸 조용히 억누르려 하지 않고 감정이 폭발해버리는 인간"이란 부분이 내 방식으로는 이렇게 읽힌다. "욕망을 감추지 않고 직면하는 인간"으로 말이다.

나 스스로를 돌아보면서도 그렇고 현대 사회의 문명인들을 봐도 그렇다. 문명화 되어 길들여진 본인을 본모습이라고 여기는걸 보면 뭔가 기만적으로 느껴진다. 스스로를 기만하고 남도 기만한다.
현대인이 우울을 극복하려면 스스로를 기만하지 말고 원초적 욕망을 직시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가기에 시구루이는 좋은 참고가 되는 것같다. 

마지막으로 난조 노리오의 '잔혹에 대해'라는 글은 난조 노리오가 시구루이에서 무엇을 그려내고 싶었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난조 노리오가 그리고 싶었던 건 사실 잔혹이 아니라 폭발하는 생명력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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